To. 울고 있는 나에게
어쩌면 이 글을 보기까지 울고 있는 나에게 남긴다. 이 편지는 위의 책을 읽고 쓴 글이다. 가끔씩은 나도 내가 왜 우는지 모를때가 있다. 그것은 이 글을 있는 현재의 나에게도 적용이 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잠언 18장에서 비전이 없으면 백성들이 빙자해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비전이 무엇이기에 이것이 없으면 자제력을 잃고 신중함을 상실한다는 것인가? 비전은 문자적으로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통찰력 또는 상상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나의 시선이 목적을 뛰어넘어 더 먼 곳을, 더 먼 시간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더 먼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절대 현재의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내일을 향해 새로워지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빙자해진다. 그들은 오늘만 사는 듯이 눈앞의 이익이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다. 그러니 비전을 갖지 않으면 사람은 방자히 행하며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전은 꿈이 아니다. 물론 꿈을 비전을 의미할 수 있지만 “꿈 깨라” 와 같은 것들의 꿈은 그저 상상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비전은 실현 가능한 미래를 전제로 하는데에 비해서 꿈은 꿈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이 둘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헷갈려하는 것이 비전과 야망이다. 물론 야망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한다는 곳에서 분명히 앞서 말했던 꿈과 구별된다. 하지만 야망과 비전은 같은 말이 될 수 없다. 비전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현실이 아닌 미래에 시선을 두어서 좀 더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들은 그 비전의 이름으로 절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모두가 함께 행복한 것을 꿈꾼다. 하지만 야망은 욕심의 결과이다. 욕심의 에너지가 원동력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피해를 주고 스스로에게도 피해를 준다. 하지만 야먕에 눈이 먼 사람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을 키워만 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된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야망이요 망상이다.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나의 비전’ 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비전의 사람, 요셉
오늘날 많은 요셉은 비전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 꿈에서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꿈꾸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꿈에서는 부모님까지 자신에게 절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요셉이 그것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요셉은 그것을 비전으로 삼았기에 총리가 될 수 있었으며 우리도 요셉처럼 큰 비전을 가지고그것을 이루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셉이 그 꿈을 비전 삼았다면 노예로 팔려간 그가 보디발의 관리자가 되었다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그는 이 절망스러운 현실에,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비전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비전으로 삼지 않았다. 그의 비전은 그 꿈이 아닌 하나님 한분뿐이었다. 성경에서는 형들이 그에게 절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그때의 그 꿈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기억해냈다고 적혀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눈으로 보았을 때 그때의 꿈이 생각난 것이다. 항상 생각하고 그것을 목표로 두었던 것이 아님을 이 성경구절이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요셉은 그 꿈을 비전으로 삼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셨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