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Jan
14Jan

우리의 미래


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십 번의 예배를 드렸지만 정작 내 머리에 박혀있는 기독교의 진리, 교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상이나 교리가 들어왔을 때 그것이 왜 기독교와 다른 것인지 그것은 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심각했던 건 나도 모르는 새에 기독교가 아닌 사상을 기독교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는 나를 보며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파트에서는 정말 많은 교리 들와 사상이 난무하는 현대시대에 미래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이 기독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것은 왜 진리가 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내가 지금부터 소개할 사상은 기독교적인 사상이 아닌, 기독교와 혼동하고 헷갈려하는 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여러분도 읽으면서 이 점을 유념하고 읽기를 바란다.


세상의 여러 가지 관점들 우리가 오늘 알아볼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초점으로 맞출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오신 후를 초점으로 맞출 것이냐로 나뉜다. 그럼 먼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을 초점으로 둔 사람들부터 알아보자. 이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오기 전. 즉, 우리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아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완성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에 예수님을 끼워 넣을 뿐이다. 그 과정에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킨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것의 원천이 우리이면 안된다. 우리의 세상에 하나님을 반영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이 꿈꾸었던 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이 완벽해지는 곳, 유토피아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가 완전해질 수 있는 그것을 꿈꾸며 현재의 삶에서 발버둥 친다. 어떻게든 그곳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이 사상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때문에 끝없는 악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그들이 유토피아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근본적인 악의 문제인 죄를 해결하였다. 이렇게 수준 높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이런 사상가들과 같은 나열에 서서 평가받는다는 것은 참 분한 일이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난 뒤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에게 대해 알아보자. 이 관점은 기독교사상과 매우 비슷해 보인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어서 하나님 나라는 선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으로 구분 짓는다.


이들은 악한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무엇을 얻든지 그것은 악이라며 무소 유등을 강조하고 세상에 나가서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등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기며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 창조계는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곳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희망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가 바라보는 미래의 희망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기독교는 우리의 근본적인 구조인 창조-타락-구속을 우리의 희망으로 보고 있다. 그럼 먼저 창조부터 알아보자. 창조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창조된 것이 그저 자연으로써 선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로써 선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자신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분의 흔적들, 그분의 피조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분을 이 세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내가 나의 체취가 담긴 목도리를 다른 방에 두고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목도리의 냄새를 맡고 나의 것임을, 예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곳에 있지 않지만 그들은 나의 흔적을 보고 그 목도리의 주인에게 이 방이 그가 만들었음을 알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하고 그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타락을 알아보자. 타락은 악의 성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말하는 악은 피 조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부패해서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변화무쌍함이 창조계의 더 큰 목적을 가리키는 방향표 역할을 한다. 오히려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란 창조주이신 하나님 대신에 자연물, 피조물의 특정 부분을 경배하는 우상숭배를 말한다. 우리가 이런 악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속이다. 먼저 구속이란 단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속은 우리나 이 세상을 새로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 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속은 악의 문제. 즉, 우리의 죄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받았는데, 구원이라는 개념은 승천과 부활 등 많은 것들을 이해한 후에야 완전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승천과 부활을 헷갈려한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죽어서 천국으로 가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그저 느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회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천국을 설명할 때 하늘과 땅으로 분리해 천국은 하늘에 있으며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을 그려놓은 그림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구름이 있는 하늘인 것을 무의식 중에 인정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로 가신 것은 맞으나 그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과 땅의 하늘이 아닌 땅의 통제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간으로 들어가신 것이고 그곳은 천국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통제하시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곁에 항상 계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리는 참 인기가 없다. 이 교리가 인기가 없게 된 이유는 자극적인 것만 찾는 현대 사람들의 심리도 있겠지만 이 승천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며 다른 개념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만큼 승천이라는 개념은 중요한데, 승천의 중요성은 다른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만약, 승천이 무시되었을 때를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교회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위의 주님이 아닌 백성 가운데 계시는 존재로 의미가 축소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올라간다라고 해서 단지 한층 위로 올라가는 개념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따라서 승천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을 위미 하며 여기에서 하늘과 땅을 비유로 쓴 이유는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실 수 있으며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마지막 날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힌트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 즉, 재림하실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다 심판하시고 이 세상이 끝날 건데 뭐하러 우리가 지금 열심히 살아야 하며 이 환경을 보호해야 하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재림이 지금 세상은 파괴될 운명이고 선택받은 몇 명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시나리오의 한 부분으로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약성경은 새롭게 하실 때 예수님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직접 나타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에 이 역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는 방향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현재의 세상에서 미래의 세상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인 치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미 현재에 우리를 만나러 오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을 포기한다든가, 이 세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든다, 우리의 노력으로 새로운 나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상 숭배하는 일을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것이 이해가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가 왜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가 비전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곳이며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곁으로 갈 사람들을 전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뜻과 그로 인한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닌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곳에 임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다리의 역할로 직업과 진로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가져야 할 진로와 비전에 대해 알아보자.
이 내용은 내가 ‘문서선교사’라는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으로 아래 책으로 공부했다. 만약 이 내용에 더 관심이 있다면 아래의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진로와 비전


비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잠언 18장에서 비전이 없으면 백성들이 빙자해진다는 것이다. 도대체 비전이 무엇이기에 이것이 없으면 자제력을 잃고 신중함을 상실한다는 것인가? 비전은 문자적으로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읽고 보는 통찰력 또는 상상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나의 시선이 목적을 뛰어넘어 더 먼 곳을, 더 먼 시간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더 먼 곳을 바라보기 때문에 절대 현재의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하루가 다르게 내일을 향해 새로워지는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비전이 없는 사람은 빙자해진다. 그들은 오늘만 사는 듯이 눈앞의 이익이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들에게는 내일도 없고, 미래도 없고, 희망도 없고, 소망도 없다. 그러니 비전을 갖지 않으면 사람은 방자히 행하며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전의 독보적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전은 꿈이 아니다. 물론 꿈을 비전을 의미할 수 있지만 “꿈 깨라” 와 같은 것들의 꿈은 그저 상상보다는 조금 더 구체적인 망상에 불과하다. 비전은 실현 가능한 미래를 전제로 하는데에 비해서 꿈은 꿈으로 끝나버리는 것이 이 둘의 차이점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헷갈려하는 것이 비전과 야망이다. 물론 야망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한다는 곳에서 분명히 앞서 말했던 꿈과 구별된다. 하지만 야망과 비전은 같은 말이 될 수 없다. 비전은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현실이 아닌 미래에 시선을 두어서 좀 더 밝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을 성장시킨다. 그들은 그 비전의 이름으로 절대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은 모두가 함께 행복한 것을 꿈꾼다. 하지만 야망은 욕심의 결과이다. 욕심의 에너지가 원동력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피해를 주고 스스로에게도 피해를 준다. 하지만 야먕에 눈이 먼 사람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을 키워만 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된 비전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의 목표를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야망이요 망상이다. 방법은 정말 간단하다. ‘나의 비전’ 이 아닌 ‘하나님의 비전’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비전의 사람, 요셉 

오늘날 많은 요셉은 비전의 아이콘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 꿈에서 형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을 꿈꾸었다고 말했다. 두 번째 꿈에서는 부모님까지 자신에게 절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요셉이 그것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다고 말한다. 요셉은 그것을 비전으로 삼았기에 총리가 될 수 있었으며 우리도 요셉처럼 큰 비전을 가지고그것을 이루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셉이 그 꿈을 비전 삼았다면 노예로 팔려간 그가 보디발의 관리자가 되었다가 다시 감옥으로 끌려갔을 때 그는 이 절망스러운 현실에,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 비전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 꿈을 비전으로 삼지 않았다. 그의 비전은 그 꿈이 아닌 하나님 한분뿐이었다. 성경에서는 형들이 그에게 절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그때의 그 꿈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기억해냈다고 적혀있다.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눈으로 보았을 때 그때의 꿈이 생각난 것이다. 항상 생각하고 그것을 목표로 두었던 것이 아님을 이 성경구절이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요셉은 그 꿈을 비전으로 삼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셨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것에 가려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초월하여 그분의 뜻을 이루는 청지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진로


여러분은 어떠한 기준으로 진로를 선택하나요?
만약 우리가 직업을 선택하는 기준이 나라면 그것은 엄청난 변수와 후회들을 몰고 온다. 그 증거로 취직을 한 많은 사람들도 자신의 진로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며 사람들과의 관계나 갈등을 피해서 직장을 옮기기도 한다. 그런데 갈등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직장뿐만 아닌 가정, 학교 등 여러 곳에서 갈등이 발생하지만 그것을 피하는 것이 우선시 되어 나의 결정에 영향을 준다면 그 선택은 또다시 다른 후회와 갈등을 낳을 뿐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직업이 아닌 하나님을 위한 직업과 그것을 위한 선택을 이어나간다면 우리는 훨씬 편하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 것이다. 이에 대해 로마서 14장 7절에서 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이로다” 이 글은 사도바울이 쓴 글로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의하고 있다. 우리는 살든지 죽는지 주를 위해서여야 한다. 이것을 직업이라는 것에 초점을 준다면 우리가 직장을 어떤 것을 선택하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이다.


BAM은 Business as mission이라는 의미로써 직장에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몇몇 크리스천들에게 어떤 직업을 꿈꾸냐고 물어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저 BAM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데 BAM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BAM 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떠한 영역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은지를 자세하게 짜는 흔히들 말하는 사명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사명이라고 하면 굉장히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이 나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시는지도 모르겠고, 성경에는 나의 직업에 대해 예언해놓은 것도 없고 다른 사람도 나의 직업을 정해주지 않기에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하는지 굉장한 고민들이 드는데, 하나님은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시는 분이다.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의심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도록 노력하자.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가 갖는 직업은 모두 하나님을 위한 일이지만 그 가운데는 직업과 가질 수 없는 직업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식물에 ‘접붙이기’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귤나무 가지를 탱자나무나 식물에 붙인다면 탱자다 열릴까? 아니다. 탱자나무는 단지 접붙여진 귤나무 가지에 귤이 필요로 하는 양분을 제공할 뿐, 어떤 경우에도 탱자가 열리게 할 수는 없다. 이처럼 크리스천에게도 자기 직업을 접붙일 수 있는 직업이 있고 그래서는 안 되는 직업이 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해서 술집을 운영하고 창녀를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 그 돈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부하고 이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뿐이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를 창녀로 쓰고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술을 권유하는 것이 어떻게 셩경적일 수 있을까? 치킨을 파는 가계가 음식 안에는 온갖 안 좋은 것들을 놓으면서 그저 나오는 햄버거의 표지에만 성경말씀이 적혀있다면 그것은 과연 진정한 하나님을 위한 직업일까? 만약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몸을 상하는 음식을 다른 사람에게 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다면 그 직업이 무엇이든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여러분이 어떠한 직업을 가지든 간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진짜 기쁨은 나를 위해 사는 것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때에 있다.
이 챕터는 옆 책의 내용과 나의 글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더 많은 내용이 알고 싶다면 이의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이제 새로운 출발점


혼란의 세대 

창세기에서 처음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에 이 세상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공허하고 흑암이 있었다는 의미는 카오스 즉, 무질서했다는 의미 한다. 그리고 그 무질서가 하나님으로 인해 질서 있게 바뀌게 되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사는 이스라엘이 다른 제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 일어났다. 종교집단은 오히려 썩을 만큼 썩었던 그때에 예수님께서 혼돈과 흑암 속에 등장하셨고 그 속에서 새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처럼 공허와 혼돈 속에 빠져있을 때 바로 그 안에서 새로운 역사는 반드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부패해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의 정치는 말할 것도 없이 부패해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 심지어 교육까지 부패하기 시작한 것이 한국사회의 모습이다. 서구 선진 사회를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가 부끄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갑사 하기도 하다. 우리가 서구 선진 사회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든지 보람 있는 삶을 살 수 있겠지만 한국의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함께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 무엇을 길러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첫 번째로 바른 시력을 길러야 한다. 바른 시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성경인물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사도바울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참 바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안수했을 때 눈에 비늘 벗겨지는 것 같다는 표현을 했다. 그는 이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자에게 내일의 파멸을 바라보아야 하며 정직하게 걸어가는 사람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주실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한다. 바른 시력을 기르는 것부터 새 역사의 시작이다.


두 번째는 바른 실력을 길러야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실력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공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 교양, 인격 등 모든 면에서 실력의 높이와 깊이를 파 해쳐 나가야 한다. 다시 바울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가 사도행전을 완성하고 신약 27권 중 13권을 그가 쓴 것은 그가 바른 실력과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력을 갖춘 사람은 새 역사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실력을 갖추기 못한 사람도 그곳에 참여할 수 있으나 그 진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그 사람은 역사가 그의 삶 속에서 왜곡되고 말 것이다.


세 번째는 용기를 걸러야 한다. 앞서 삶의 패턴 챕터에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한 세 가지 질문들 중 만약 우리가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우상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곳이었다면 우리는 앞의 세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자. 말을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다. 그런데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삶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어떠한 작은 일을 할지라도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있다면 그 일은 빛의 통로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진리대로 용기를 기르지 않는 이상 또 한 사람의 바리새인이 될 뿐이다.


네 번째는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사용했던 것은 최신병기가 아닌 돌멩이 들이었다. 볼품없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역사하심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에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지금, 우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에게 맞는 옷을 선택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러 갈 때 다윗은 방어력이 뛰어난 다른 사람의 옷이 아닌 방어를 할 수 없지만 자신에게 제일 알맞은 목동의 옷을 입고 골리앗을 쓰러뜨렸다. 만약 골리앗이 그 갑옷을 입고 갔다면 그 걸리적거리는 것을 입고 돌멩이를 명중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맞는 옷이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보고 입어야 한다.

이 챕터는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는 책의 내용과 나의 글이 함께 있다. 이 내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서약서
결혼할 때 우리는 모두의 앞에서 약속을 한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해석한 결혼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을 증인으로 세워 약속함으로 우리는 이제 부부이며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이 서약서도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인생을 살면서 함께였으며 앞으로도 함게 할 하나님을 증인으로 나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옆에는 내가 만든 서약서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이건 서약서이기도 하지만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탁드리기 전에 나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것을 맹세하는 나의 기도이다. 그리고 그것을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어서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이제 이 서약서를 끝으로 이 책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우리가 서약서를 소리내어 읽고 자신의 이름을 적고 각자의 삶에서 실천하며 스스로의 신앙을 더 단단히 다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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