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항상 가졌던 질문이었다. 모태신앙이었던 나에겐 하나님은 공기처럼 당연하게 여기지는 존재가 되어 버려서 이것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 계시지 않다 하는 것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물론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모세의 홍수와 같은 것들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지만 이것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확실하게 결정하기는 어럽다. 때문에 이것은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이걸 세계관이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시다 안 계시다,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각자가 선택한 신념인 것이다. 거기에서 이제 하나님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좋은 건가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더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은 각자가 선택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하나님 계시다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 하지만 계시지 않다는 것 또한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릴 때 그리고 지금 경험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알고 있다. 때문에 나는 만약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더라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그저 전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거부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이 질문은 내가 기도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을 때 들었던 질문이었다.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주제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모두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을 불러내는 주문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나뿐만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어서 변질된 신앙으로 변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말이다. 그러나 20세기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는 자신의 저서인 고통의 문제, 개인기도 등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맞춰지는 것에 있다.”라고 말이다. 어떤 일에 대한 결과가 바뀌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가 대화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요술이 아니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나님과 대화하기 챕터에서 다루고 있으니 참고 바란다.
알빈 플란팅가라는 사람이 이런 질문에 대해 주유 의지 논증으로 이 질문을 반박해 낸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의 개입 성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관여하실 수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관여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을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수행하는 존재로만 산다면 우리는 고통받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자유가 될 수 없다. 그렇게 된 세상에는 악이 존재하지 않겠지만 선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이다.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선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의 개입을 낮추면서까지 세상의 온갖 부조리와 전쟁과 핍박들을 허용하면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보장을 원했다. 인간이 자신에게 복종하는 로봇이 아닌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너무나 오래된 일이기 때문에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리고 신학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증거를 남겨놓았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아니, 오히려 목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복음서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기적을 표적이라고 표현했다. 기적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각각의 기적이 예수님 자신의 사역과 정체성에 대한 비유였다. 오히려 예수님은 기적은 비유라고 하는 것이 아닌 기존 자체가 주는 행복이나 만족감은 통해 자신을 받으려는 행동에 대해 비판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니라.(요 6:26).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증거를 땅에 기적의 증거를 남겨주고 싶지 않으셨다면 그 기적에 집중하지 않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렇게 많은 고민들을 하실 것으로 아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증거도 남겨 놓으신 것은 요한복음 20장 2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유추할 수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하는 말씀에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선명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들을 남겨좋으실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했다면 누구든지 믿어야만 했을 것이다. 눈에 증거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저 보았기 때문에 고백하는 믿음이 아닌 보지 않고도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그런 깊은 신앙을 원하셨기 때문에 증거들을 남겨좋지 않으신 건 아닐까 하고 유추할 수 있다.
이것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가지는 고민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지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짓는 나의 모습을 마주하며 드는 의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번에 바뀔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존재적 죄인이다. 그런 우리의 존재는 죄인에서 구원받은 자로 그 존재가 바뀌었지만 죄인이었을 때의 습관이 남아있다. 바로 죄의 습관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계속 관계맺을 때 그 죄들이 불편하게 다가오고 고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번에 되지는 않을 것이다. 천천히 서서히 바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재촉하지 말며 당신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것을 천천히 바꿔가려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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