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서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수십 번의 예배를 드렸지만 정작 내 머리에 박혀있는 기독교의 진리, 교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사상이나 교리가 들어왔을 때 그것이 왜 기독교와 다른 것인지 그것은 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흔들렸던 것 같다. 하지만 제일 심각했던 건 나도 모르는 새에 기독교가 아닌 사상을 기독교의 일부로 취급하고 있는 나를 보며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 파트에서는 정말 많은 교리 들와 사상이 난무하는 현대시대에 미래를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이 기독교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그것은 왜 진리가 될 수 없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 따라서 내가 지금부터 소개할 사상은 기독교적인 사상이 아닌, 기독교와 혼동하고 헷갈려하는 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여러분도 읽으면서 이 점을 유념하고 읽기를 바란다.
우리가 오늘 알아볼 세상을 바라보는 여러 가지 관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오시기 전을 초점으로 맞출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께서 오신 후를 초점으로 맞출 것이냐로 나뉜다. 그럼 먼저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을 초점으로 둔 사람들부터 알아보자. 이들은 예수님의 나라가 오기 전. 즉, 우리의 행동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가 아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완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완성시킬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에 예수님을 끼워 넣을 뿐이다. 그 과정에 예수님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킨단 말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그것의 원천이 우리이면 안된다. 우리의 세상에 하나님을 반영시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들이 꿈꾸었던 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이 완벽해지는 곳, 유토피아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가 완전해질 수 있는 그것을 꿈꾸며 현재의 삶에서 발버둥 친다. 어떻게든 그곳을 완성시킬 수 있다고 믿으면서. 하지만 이 사상에는 여러 가지 오류가 있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완벽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때문에 끝없는 악을 주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그들이 유토피아로 갈 수 있다고 해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그 근본적인 악의 문제인 죄를 해결하였다. 이렇게 수준 높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이런 사상가들과 같은 나열에 서서 평가받는다는 것은 참 분한 일이다.
그럼 이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난 뒤에 초점을 두는 사람들에게 대해 알아보자. 이 관점은 기독교사상과 매우 비슷해 보인다.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어서 하나님 나라는 선이라고 말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악으로 구분 짓는다.
이들은 악한 이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무엇을 얻든지 그것은 악이라며 무소 유등을 강조하고 세상에 나가서 일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등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기며 많은 문제를 초래한다. 하지만 이 창조계는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래서 우리 각자의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곳에 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기독교가 바라보는 미래의 희망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기독교는 우리의 근본적인 구조인 창조-타락-구속을 우리의 희망으로 보고 있다. 그럼 먼저 창조부터 알아보자. 창조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기 때문에 선하다. 창조된 것이 그저 자연으로써 선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물로써 선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자신은 그곳에 들어가지 않는 세계를 창조하지만 그분의 흔적들, 그분의 피조물들을 보면서 우리가 그분을 이 세계에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내가 나의 체취가 담긴 목도리를 다른 방에 두고 나는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나의 목도리의 냄새를 맡고 나의 것임을, 예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그곳에 있지 않지만 그들은 나의 흔적을 보고 그 목도리의 주인에게 이 방이 그가 만들었음을 알고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구하고 그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타락을 알아보자. 타락은 악의 성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말하는 악은 피 조성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부패해서 변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변화무쌍함이 창조계의 더 큰 목적을 가리키는 방향표 역할을 한다. 오히려 이것이 없었다면 우리는 더 쉽게 우상숭배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말하는 악이란 창조주이신 하나님 대신에 자연물, 피조물의 특정 부분을 경배하는 우상숭배를 말한다. 우리가 이런 악에 빠졌을 때 우리에게는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속이다. 먼저 구속이란 단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속은 우리나 이 세상을 새로 갈아엎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노예 된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구속은 악의 문제. 즉, 우리의 죄를 해결한 후에 그것을 다시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받았는데, 구원이라는 개념은 승천과 부활 등 많은 것들을 이해한 후에야 완전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승천과 부활을 헷갈려한다. 승천은 예수님께서 죽어서 천국으로 가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예수님은 돌아가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그저 느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회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천국을 설명할 때 하늘과 땅으로 분리해 천국은 하늘에 있으며 구름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을 그려놓은 그림을 자주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가 구름이 있는 하늘인 것을 무의식 중에 인정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바로잡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하늘로 가신 것은 맞으나 그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과 땅의 하늘이 아닌 땅의 통제실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간으로 들어가신 것이고 그곳은 천국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분께서 그곳에서 우리를 통제하시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 곁에 항상 계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리는 참 인기가 없다. 이 교리가 인기가 없게 된 이유는 자극적인 것만 찾는 현대 사람들의 심리도 있겠지만 이 승천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하는 기본적인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며 다른 개념들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만큼 승천이라는 개념은 중요한데, 승천의 중요성은 다른 곳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만약, 승천이 무시되었을 때를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교회가 그 빈자리를 채우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 위의 주님이 아닌 백성 가운데 계시는 존재로 의미가 축소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가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올라간다라고 해서 단지 한층 위로 올라가는 개념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따라서 승천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을 위미 하며 여기에서 하늘과 땅을 비유로 쓴 이유는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지켜보실 수 있으며 우리와 함께 계시며 마지막 날에 구원이라는 개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내가 '문서선교사' 라는 수업에서 읽었던 책이었는데, 이 창의활동에서도 읽을 정도로 정말 설명이 잘된 책이다. 여러분도 이 책을 꼭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다.